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의 학덕을 기리고자 1634년(인조12)에 설립되어 사계서원이라 하였다. 1660년(현종1)에 ‘돈암’이라는 사액을 받은 호서지방의 대표서원으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후 아들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역, 동춘당 송준길을 차례로 추향하였다. 이로써 돈암서원은 노론의 핵심서원으로 정치적 구심점이 되었다.
돈암은 주자의 호 둔옹(遯翁)에서 가지고 왔다. ‘은둔하는 노인’이라는 의미이다. 둔(遯)을 우리는 돼지라는 의미를 덧붙여 돈으로 읽는다. 그래서 돈암을 돼지바위라고도 한다.
돈암서원은 사계가 낙향하여 양성당을 지어 학문에 전념하면서 강독했던 장소로 김상용, 김상헌, 조익, 정엽, 소강진, 이단하, 심광세, 홍천경, 신흠, 이정구, 장유, 정옹명 등 많은 문인들의 시가 걸려 있다. 이로써 양성당은 사계가 죽기 전까지 호서지방의 선비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응도당
돈암서원의 중심축에 위치해야 하는데 구석에서 눈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돈암서원의 배치를 보면 생경스럽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이 배치되며 강학당 앞에 동재와 서재가 배치된다. 그러나 돈암서원의 강학공간인 응도당은 돈암서원의 좌측 구석에 배치되어 있고, 응도당의 전면 좌측에 사당인 숭례사와 사계의 서재인 양성당 그리고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강학공간의 전면 좌우에 있어야 할 동재와 서재가 응도당을 등지고 있는 모습도 낯설다.
왜 그렇게 배치되었는지 그 연유를 살펴보자.
돈암서원은 후학들이 사계가 학문에 전념한 양성당(논산시 연산면 임리 249번지 일대)을 중심으로 1660년에 건립하였다. 1854년과 1874년의 두 번의 홍수로 돈암서원 일대가 물에 잠기자 1880년(고종17)에 현재의 자리(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로 양성당과 사당을 이건하였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서원 중에 돈암서원은 홍수로 이건한 유일한 사례이다.
송병선은 돈암서원의 이건 이유를 돈암서원이건비에
“연대가 오래됨에 따라 山谷이 변하고 물길이 바뀌어 서원의 담장까지 물이 침식하는 것은 형세 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士林들이 이것을 늘 걱정하여 今上 경진년(1880, 고종17)에 다시금 거기에서 남쪽으로 1리 떨어져 있는 虎溪의 언덕에 터를 잡아 새로 지었다”라고 밝혔다.
돈암서원의 사당_숭례사
[돈암서원 현 자리에 대한 풍수적 관점]
돈암서원의 주산은 수락산이나 입수처가 불분명하다. 즉 지맥이 없으며 용이 무정한 곳에 서원의 자리를 정했다. 이런 곳은 서원의 자리라기보다는 민가의 자리이다. 1880년 서원을 이건할 때 완전한 이건을 하지 못했다. 응도당(보물 1569호)의 자리를 정하지 않고 양성당을 강학당으로 대체한 것은 이건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이는데 이는 후학들의 무심함으로 비쳐진다. 1960년에 고직사를 신축했고, 1971년에 응도당을 이건하였으며, 1974년에 외삼문을 이건하였고, 1997년에 동재와 서재를 지었고, 2006년에 산앙루를 지어 현재의 모습이 이른다. 다시 말해 현대의 손길이 잦은 서원이다.
전사청
전사청은 전사관이 머물며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국가기관이다. 서원에서 전사청은 고직사의 기능도 포함하여 제반 살림을 맡아 제수를 준비하거나 원생들을 뒷바라지 하는 곳이다.
돈암서원 산앙루
산앙루는 전통형식을 갖춘 2006년에 지은 현대건물이다. 돈암서원의 격에 맞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돈암서원의 공간적 역사성은 빈약하다. 사계선생께서 계셨던 장소나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돈암서원은 사계선생의 도학정신을 구현한 공간인데 무계획한 이전으로 사계선생께 누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더불어 돈암바위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돈암바위도 없다. 다만 사계선생이 거거했던 양성당 건물을 옮겨 놓았으나 그분이 선택한 공간이 아니므로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공간의 역사성이 매우 아쉬운 돈암서원이다. 자리를 잘못 잡은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