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
1) 시조 : 석탈해왕[昔脫解王]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월성(月城)은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개국하여 사로국, 즉 서라벌이라 하였다가 후에 신라로 불려오던 중 65년에 계림으로 개명되었고, 기림왕때 다시 신라로 고쳤으나 고려때 경주로 개칭하였다.
월성석씨(月城昔氏)의 시조는 신라 제4대왕인 탈해이사금 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탈해왕의 탄생에 대한 신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왜국의 동북천리에 있는 다파나국의 왕이 여왕국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했더니 7년만에 큰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림이 좋겠다"고 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궤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우고 떠가는대로 맡겨 두었다. 궤짝을 실은 배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자, 배는 다시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지금의 영일만)에 닿으니 이때가 기원전 19년 이었다. 이때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아진의 선이라는 노파가 이를보고 새끼줄로 배를 매어 해안으로 끌어 올린후 궤를 열어보니 용모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키가 9자나 되고 풍모가 준수하여 지혜가 뛰어났다. 그러나 아이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여 처음 배가 올때 까치가 울면서 따라 왔으므로까치 작(鶴)자에서 새조(鳥)를 떼어 버리고 석(昔)을 성으로삼고, 포장한 궤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는 이름을 지었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는 것을 업으로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추호도 게으름을 피는 기색이 없었고, 자라면서 학문과 지리에 능통하여 지혜가 뛰어났으므로 남해왕이 맏공주를 그에게 주고 대보(大輔)로 등용하여 정사를 돌보게 하였다.
57년 유리왕이 임종에 이르자 "아버지 남해왕이 고명할 때 '내가 죽은뒤 아들이나 사위를 논할 것 없이 연장자나 어진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라 하여 과인이 왕위에 올랐으니 지금은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하는 것이 좋다"고 하며 신라 제4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로 부터 석씨는 신라 56대중 에 걸쳐 171년간 왕통을 이었다.
4대 탈해왕 9대 벌휴왕 10대 내해왕 11대 조분왕
12대 첨해왕 14대 유례왕 15대 기림왕 16대 흘해왕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탈해왕을 시조로 받들고 월성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으나 그 후의 계대가 실전되어 고려조에서 교서랑을 지낸 석재흥(昔載興)을 1세조 가통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때 병부령을 지낸 시종(時宗)과 밀직사 운니(運尼)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좌복야 한일(漢一)의 아들 정민(風)은 예의시랑을 거쳐 평장사에 콜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조선조에 와서는 부사 상률(相律)과 판관 용진(龍眞), 부호군 광국(光國), 오위장 병권(炳權)이 뛰어났으며, 봉혁(鳳爀)은 감찰을 지냈고, 건민(鍵民)과 우성(羽盛)은 부호군을 역임하여 월성석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성, 경주석씨(月城·慶州昔氏)는 남한에 총 1,932가구, 7,9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북 상주군 중동면 일원
충남 논산군 논산읍 취암리
경북 금릉군 이면 일원
석탈해왕의 설화
어렸을 때 석탈해는 종 두 사람을 데리고 토함산(吐倉山), 지금 불국사가 있는 산에 올라가서 어디 살만한 곳이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 때 지형이 마치 반달 같은 곳을 발견해서 살만한 곳이리라 생각했다. 그곳을 찾아가 본즉, 그 집은 호공(郭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석탈해는 꾀를 내어 그 근처에 돌아가며 숯덩이들을 몰래 파묻었다.
그리고는 이 집이 본래 내 집이니 내놓으라고 호공에게 야료를 부렸다. 호공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서 회유해 보았으나 석탈해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호공과 탈해는 다투다 못하여 관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관가에서는 석탈해를 불러 물었다. "이집이 네 집이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우리 집은 본래 대장장이였습니다. 잠시 타향살이를 하는 동안 이 사람이 제집을 차지한 것입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면 땅을 파 보십시오. 틀럼없이 무슨 흔적이 있을 것입니다."
땅을 파 보니 과연 근처에 놓이 있고 또 대장장이의 도구가 나타났다. 관가에서는 드디어 석탈해에게 집을 양도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 남해왕(南解王)이 그 말을 듣고 범상한 어린이가 아닌 줄 알고, 대궐에 불러 자신의 맏사위를 삼았다.
어느 날 탈해가 동산(東山)에 올라갔다가 목이 말라, 시종에게 물을 구해오라고 명하였다. 시종은 요내정(遙乃井)이라는 우물에서 물을 구해 바치려다. 너무 목이 말라 자기가 먼저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물 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주인에게 갔다. 탈해가 그 일을 꾸짖자 "금후로는 길이 멀던 가깝던 결단코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맹세하였다. 그때서야 물 잔이 입에서 떨어졌다. 그 후 시종들은 다시는 석탈해의 명을 소홀히 함이 없었다. 석탈해는 23년 동안 임금의 자리에 머물면서 훌륭한 선정을 베풀었다.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내 뼈를 깎아서 초상(肖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명을 받들어 뼈를 수습하였는데, 뼈마디가 굵고, 장대함이 천하 무적의 장사모이었다고 한다. 왕의 유조를 받들어 장사지내고 그 조상을 토함산에 안치하였다. 제사는 매년 국비로써 춘추(春秋)로)를 냈으며 그 장소는 숭신전(崇信殿)이었다고 한다.
석탈해왕의 탄생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진리 마을에 옛날 임금님께 생선을 장만하여 바치는 아진의선이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까악 깍깍 까치들의 울음소리에 깊이 잠들었던 의선 할머니는 눈을 떴다. "웬일일까? 이 바닷가에서는 까치들이 우는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웬 까치들일까?" 의선 할머니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밖을 내다봤다. 새벽 바다는 한없이 조용한데 낯선 배 한척이 바닷가 모래벌에 닿아 있고, 까치들은 그 배를 애워싸고 까악까악하고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는 것이었다. 의선 할머니는 우선 배의 닻을 모래 바닥에 박아놓고 배에 올라가 보았다 배엔 사람은 없고 크다란 궤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의선 할머니는 그 궤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여 열어보려 하였으나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하늘에 물었다.
"하느님이시여 이 궤를 열어 보오리까. 그냥 버려 두오리까?"하며 하늘을 우러러 봤더니 "의선이여 이 궤를 열어 보아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선 할머니는 용기를 내어 궤의 뚜껑을 열었다. 궤 속에는 비단 보자기에 싼 큰 알이 있었는데 궤 뚜껑이 열리자 알이 깨어지면서 건장한 사내 아기가 나왔다. 아기 주위에는 많은 보물이 싸여져 있고 잠을 자던 궁녀들이 일어나서 손뼉을 치면서 아기의 탄생을 기뻐하였다. 의선 할머니는 너무도 놀라와 당신들은 누구며 무슨일로 이렇게 궤 속에 있었냐하고 물었다. 이 때 한 궁녀가 일어서서 말했다.
“할머니 저희들은 용성국 함달파 왕비님의 시녀들입니다. 왕비님께서는 왕자아기를 얻고자 오래 기도를 드린 끝에 아기를 배었으나 열달이 지나고 또 열달이 지나도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님도 왕비님도 애타게 아기의 탄생을 기도 드렸습니다. 7년만에야 드디어 왕비님께서 해산하셨는데 그 때에도 태어난 것은 아기가 아니고 고 커다란 "알"이었습니다. 함달파임금님께서 대단히 실망하시고 노하셔서 알을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왕비님께서는 슬퍼서 울었습니다. "알 속에는 틀림없이 왕자 아기가 들어있을 터인데 아기가 깨어날 것을 기다려 보지도 않고 버리라는 것은 너무나 야속하다" 하시면서도 임금님의 명령이라 거역 할 수 없어 알을 비단 보자기에 싸서 큰 궤에 넣으시고 배에 실려 떠 보내시면서 저희들에게 부탁 하셨습니다. “이 알에서 반드시 왕자 아기가 태어날것이니 인연있는 나라에 다다르거던 그 곳에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일구라" 하셨습니다. 지금 배가 이 나라에 이르자 왕자 아기가 탄생하셨으니 이곳이 인연있는 나라인가 보옵니다. 할머니 이 아기를 키워 주십시요"하며 할머니에게 아기를 안겨주었다. "하늘이 나에게 맡긴 아기시온데 어찌 등한히 하겠습니까. 정성을 다해 키우오리다. 궁녀들께서는 이곳에서 귀한 아기를 돌봐 주십시요」하고 아기를 맡아 키울 것을 승낙하였다. 「네 이 보물들은 모두 아기를 키우는데 쓰라 하셨습니다."하며 궁녀들도 무한히 기뻐하였다. 의선 할머니는 아기의 성씨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까치들의 알림으로 얻은 아기라하여 까치 작자에 왼편 글자를 따서 석(昔)이라 성을 정하고 알을 깨뜨리고 나왔다하여 이름을 탈해(脫解)라 불렀다.
석탈해는 자라서 신라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모든 국민들은 우러러 존경하였다. 지금 월성군 양남면 나아리는 그의 상률을 기념하여 붙혀진 이름이고 의선 할머니가 살던 집터를 망정(望亭)이라 부르고 있으니 까치들의 소리를 듣고 새로운 배를 바라보던 곳이란 뜻이다. 나아리에는 석탈해왕의 상륙한 내력을 새긴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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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원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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