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파평윤씨(坡平尹氏)

운강 이상걸 2023. 3. 9. 16:08

개요

경기도 파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경기도 파주는 본래 고구려 장수왕 때 '파해평사현'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인 파평현으로 고쳤다. 조선 태조 때 서원군과 파평현을 병합하여 원평군이라 하였다. 1461년 세조비 정희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파주목으로 승격하였고, 1895년 이 되었다. 그리고 파평이란 지명은 현재도 파주시 산하의 파평면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창시

파평 윤씨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인데, 훗날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랐다.

윤신달의 4대손은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은 윤관이다. 그는 고려 선종 때 합문지후와 좌사낭중을 지내고, 여진정벌에 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 함주와 영주 등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족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이르렀고, 7형제를 낳아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래서 파평 윤씨에서는 윤관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파평 윤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윤신달부터 5세손 윤관까지 전부 단일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즉 윤관은 5대 독자이며 모든 파평 윤씨는 윤관의 후손이라는 말이 된다. 시조로부터 윤관까지 세계를 내려가면 윤신달-윤선지-윤금강-윤집형-윤관이 된다.

윤관 장군의 영정. 윤관 장군은 문신이지만 별무반을 편성하여 지금의 함경도와 간도 일대를 점령하고 동북 9성(함흥·길주 등)을 쌓았다.

파주라는 명칭도 파평 윤씨 가문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세조계유정난 이후 점차 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정변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조비 파평 윤씨(정희왕후)의 고향인 원평도호부를 파평 윤씨에서 '파'자를 따와 파주목으로 승격시켰다.(원평은 서원과 파평을 합친 말이다.) 그리고 할머니 원경왕후(여흥 민씨)의 고향인 여흥 또한 여주목으로 승격시켰다.

윤관의 아들 7형제는 다시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윤관의 장남 윤언인의 손자 윤위는 남원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남원백에 봉해졌다. 그 이후 후손들을 남원 윤씨라고 불렀다. 윤위의 손자 윤돈 또한 함안군에서 난을 진압하여 함안백으로 봉해졌다. 그 이후 윤돈의 장남 윤희보의 후손들은 함안 윤씨로 분파되었고 윤돈의 나머지 세 아들의 후손들은 남원 윤씨로 세계를 이어갔다. 현재에 이르러 이 두 성씨는 유래가 명확하므로 각각 파평 윤씨 함안백파와 남원백파로 합본되었다. 연산군의 어머니로 유명한 제헌왕후(폐비 윤씨)가 함안 윤씨이다. 남원 윤씨로는 효종-숙종 연간 남인의 거두였던 백호 윤휴가 있다.

윤관의 5남 윤언식의 후손들은 윤언식의 증손자 윤은형이 덕산군에 봉해짐에 따라 덕산군파로 불려지고 있다.

이외 나머지 파평 윤씨의 분파인 문정공파(文定公派), 신녕군파(新寧君派), 대언공파(代言公派), 봉록군파(奉祿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야성군파(野城君派), 전의공파(典儀公派), 소정공파(昭靖公派), 원평군파(原平君派), 소도공파(昭度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소부공파(少府公派), 태위공파(太尉公派) 등은 6남 윤언이의 후손들이다. 이들 가운데서 후손인 판도공파(版圖公派)와 소정공파(昭靖公派)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여담으로 파평 윤씨의 대부분(80%)은 소정공파(昭靖公派)와 판도공파(版圖公派)로 다른 성씨 본관의 파에 비해 한쪽 파(派)에 많이 쏠려 있는 편이다. 후손이 적은 파도 있지만 일부 파의 대부분이 북한에 거주한 영향도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모두 22만 1,477가구, 총 71만 3,9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인구가 많은 만큼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하고 있지만, 충청도경상도 쪽에 인구 거주 밀도가 높다. 경상도 중에서는 경상북도에 인구가 많다. 경상남도의 경우 파평 윤씨가 많은 편이긴 하나 시조가 다른 칠원 윤씨의 존재로 인해 경북만큼 압도적이진 않다. 특히 거제시의 경우 파평 윤씨보다 칠원 윤씨들이 훨씬 더 많이 산다. 반면 전라도에서의 파평 윤씨 인구는 충청도, 경상도에 비해 적다. 전라도에 사는 윤씨는 남원을 본관으로 하는 남원 윤씨나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해남 윤씨인 경우가 많다. 물론 윤씨의 대성(大姓)답게 1위는 파평 윤씨이고, 해남 윤씨는 파평 윤씨 다음으로 2위, 남원 윤씨는 3위. 참고로 4위는 해평 윤씨인데 해평 윤씨는 같은 성자을 공유할 뿐, 파평 윤씨와는 시조부터가 다른 이본이다. 특히 전라남도에는 파평 윤씨보다 해남 윤씨들이 더 많다. 다만 남원 윤씨는 모두 파평 윤씨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파평 윤씨 문중에서는 범 파평 윤씨로 간주하기는 한다. 이들 본관 성씨를 가진 이가 파평 윤씨로 입적할 경우에는 대개 입적이 아닌 환적으로 간주된다. 해남 윤씨는 파평 윤씨와 일절 관련성이 없다.

번성

파평 윤씨는 조선시대 들어와 가문이 크게 번성하면서 명문 세도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미 고려 시절부터 문벌 귀족 15가문을 시작으로 권문세족 안에서도 재상지종 9가문의 명문가였다.) 파평 윤씨는 왕비를 두번째로 많이 배출한 성씨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4명[4]왕비를 배출했으며, 수많은 과거 급제자와 고관대작들이 나왔다. 그중 중종 대에서는 파평 윤씨에서 2명의 왕비(장경왕후문정왕후)가 나와 한 가문에서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싸우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판도공파의 파조는 윤승례인데, 그는 시조 윤신달의 13세손으로 윤척의 아들이다. 윤승례의 아들이 세조의 장인인 윤번이고, 윤번의 딸이 정희왕후(세조 비)이다. 판도판서공파는 윤승례의 아들 대에서 제학공파 부윤공파 정정공파로 갈라진다. 그중 정정공파에서 2명의 왕비가 나와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 빚어졌다.

윤승례의 아들 윤번은 세조의 장인이고, 윤번의 맏아들인 윤사분은 우의정, 둘째인 윤사윤은 예조판서, 셋째인 윤사흔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으며 7∼8대에 걸쳐 국구부원군과 공신부원군, 정승, 판서와 당상관들이 배출되어 조선 시대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윤사윤과 윤사흔 두 집안에서 각각 중종왕비(장경왕후, 문정왕후)가 배출되어 왕실 및 왕위 계승을 놓고,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윤사윤의 손자인 윤여필의 딸이 중종의 제1 계비인 장경왕후이고, 그녀의 오빠가 윤임이다. 장경왕후는 세자(인종)를 낳고 곧바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윤사윤의 동생인 윤사흔의 증손 윤지임의 딸이 제2 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가 되었다. 먼 친척뻘인 고모와 질녀가 같은 왕의 왕비가 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4명의 공주를 낳은 끝에 어렵사리 아들 명종을 낳았다. 그 뒤로 그녀는 남동생 윤원형을 끌어들여(소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대윤)와 정치적 암투를 벌였는데 이를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라고 한다.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명종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소윤의 승리로 끝났으나, 소윤 역시 문정왕후가 죽자 몰락하였다. 결국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파평윤씨 판도공파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소정공파는 윤승례의 형 윤승순의 아들인 윤곤의 후손이다. 윤승순은 공민왕 때 요승인 신돈의 살해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호군이 되어 왜국의 침입을 막아냈다. 창왕 때는 권근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명나라의 명에 의해 공양왕을 즉위케하였고, 판개성부사를 지냈다.

윤곤은 제2차 왕자의 난이방원(李芳遠,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손자 윤호는 성종의 장인으로서 딸이 성종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그 후 그는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윤곤의 후손 중에는 성종영의정을 지낸 윤필상이 있다. 그는 문종 때 추장문과에 급제했다. 이시애의 난에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우참찬에 특진하였다. 성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하였다는 죄로 진도에 유배되고 사약을 받았다.

그의 증손인 윤현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소정공파의 윤사로는 세종대왕의 딸 정현옹주와 결혼하여 영천군에 봉해지고, 세조 즉위년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 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파평 윤씨 출신 중 일제강점기에 작위를 받은 사람은 없다. 조선귀족 명단을 살펴보면 종종 윤씨가 눈에 띄기는 하나 파평인은 아니다. 파평 윤씨가 윤씨 중 제일 인구가 많다보니(전체 윤씨 중 약 75%)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던 윤씨라면 무조건 파평 윤씨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지만 파평 윤씨가 아니다.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일이기는 하나, 엄밀히 따져보면 조선 초, 중기와 달리 후기에는 가문의 영향력이 떨어졌던 것이 주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아무래도 당시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나중에 작위를 반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작위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버드 대학교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illett Wagner) 교수와 전북대학교 송준호 명예교수가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들의 출신 배경 및 그 행적과 업적을 종합적으로 추적한 와그너-송 프로젝트에 따르면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들 중 전주 이씨, 안동 권씨 다음으로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운영하는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전주 이씨 868명, 안동 권씨 366명, 파평 윤씨 346명(함안/남원 윤씨 포함 424명)이다.

속설

윤신달과 윤관을 거치며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선 파평 윤씨 가문에서는 잉어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갖고 있다.[8] 시조인 윤신달이 연못의 옥함에서 나왔을 때 81개의 비늘이 나 있었다는 전설과 윤관이 적에게 쫓길 때 잉어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전설 때문인데, 그래서 파평 윤씨 가문에서는 자신들이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스펀지에서 가수 윤도현, 개그맨 윤성호를 불러 관련 설화에 대해 다뤘을 때는 당시 기준으로 거의 대부분의 파평 윤씨 집안에서 여전히 잉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정확하게는 문중의 어르신 몇 명과 윤도현/윤성호에게 잉어찜을 먹이려고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 그리고 시조 윤신달 설화와 윤관의 잉어 탈출 설화를 소개했다. 여담으로 실험에 쓰일 잉어찜과 잉어탕을 만들기 위해 전문 요리사 두 명을 초빙했었는데, 잉어탕을 맡은 요리사가 파평 윤씨여서, 해당 요리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일반인 피실험자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는데 이 역시 파평 윤씨라서 잉어찜을 거부했다.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사는 데 큰 무리가 없는 제한이기에 잘 지켜지는 것인 모양. 한국에서 잉어 요리는 기껏해야 산모 보양식으로 먹는 잉어탕 정도나 전해져오는 정도기 때문이다.식당에 따라서는 드물게 특이한 요리로 내놓는 경우가 있다고는 해도 일부러 찾아갈 정도가 아니면 보기 힘들다. 또한 병이나 임신 등으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할 때는 조상님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11] 그리고 위의 요리사의 사례처럼 애초에 그렇게 엄격한 규칙도 아니고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아 알아도 신경 안 쓰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피휘와 비슷한 금기도 있다. 바로 선지국밥, 선지해장국 등에 쓰이는 선지를 '쇠피'라고 부르는 것. 바로 2세 조상의 이름이 윤선지이기 때문이다. 밖에서라면 몰라도 최소한 문중 사람들끼리 대화할 때는 되도록 쇠피라고 부른다고 한다.

파평 윤씨 집안에 전해 오는 것으로 금강산 명칭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시조 윤신달의 손자이자 중시조 윤관의 조부인 윤금강은 틈만 나면 금강산(당시 풍악산 혹은 개골산)을 찾았다고 한다. 조회마저 빼 먹을 정도라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금강산을 너무 좋아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건국 후 한참 호족들을 대상으로 한 숙청이 활발하던 때라 정치적인 일에 연루되기 싫어 그랬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윤금강이 워낙 금강산에 자주 출몰하다 보니, 그의 주변에서 윤금강이 그 산의 주인이라 하여 금강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점차 주변에 퍼져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금강산이 되었다는 말이다.[12]

파평 윤씨 여자는 기가 세다는 속설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속설은 속설일뿐이다. 조선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왕후문정왕후가 파평 윤씨이다 보니 이런 속설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

인물

역사적 인물

아래에 서술된 인물 중에는 파평 윤씨 본파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갈라져 나온 '남원 윤씨', '함안 윤씨' 등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해당 성씨들을 이 문서에 써야 하는지 아니면 본래의 성씨로 옮겨 서술해야 하는지 의논이 필요하다.

고려

  • 윤신달 - 고려 개국공신이자 파평윤씨 시조이다.
  • 윤관 - 고려 문하시중으로 여진 정벌동북 9성을 축조했다.
  • 윤언이 - 윤관의 아들
  • 윤인첨 - 윤언이의 아들
  • 이들 3대가 고려 예종 ~ 명종 대 명신으로 불리며, 『고려사』에도 그 열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윤관과 윤인첨은 태묘에도 배향되었다.
  • 윤위 - 남원 윤씨 시조로 파평 윤씨 시조인 윤신달의 8세손이며, 윤관의 장증손자다. 남원의 복기남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치 못하자 지역 수령이 보고하자 윤위가 단기로 들어가 즉각 진압햇는데, 주동자만 죽이고 나머지 무리들은 살려주자 온 경내가 탐복하고, 떠났던 남원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고, 남원을 잘 다스리자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로 인해 왕이 듣고 탐복하여 '남원백'에 봉하고 파평에서 남원으로 본관을 분관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중앙정부에서 무인들이 장악하여 윤위도 외직인 서경유수로 발령이 났는데, 이 때 수많은 유생들이 시위하며 극구 반대하였으나 끝내 외직으로 나아갔다. 서경유수로 재직하던 중 사망하자 남원 사람들이 슬퍼하고 남원에 장사지내기를 원하여 남원 땅에 묻혔다.[남원]
  • 윤극민 - 정당문학
  • 윤돈 - 문하시중

조선

  • 정희왕후 - 왕후, 세조의 정비
  • 제헌왕후 - 왕비,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모후[함안]
  • 정현왕후 - 왕후, 성종의 3번째 계비이자 중종의 모후
  • 윤필상 - 영의정
  • 장경왕후 - 왕후, 중종의 계비이자 인종의 모후
  • 윤임 - 장경왕후의 오빠
  • 윤흥신 - 수군 절제사, 윤임의 아들로 임진왜란 당시 다대포에서 싸우다 순절했다.
  • 문정왕후 - 왕후, 중종의 3번째 계비이자 명종의 모후
  • 윤원형 - 영의정, 문정왕후의 남동생
  • 조선 초에서 중기로 넘어갈 무렵인 세조에서 명종 대까지의 왕실에서 파평 윤씨의 세가 강력했다. 비슷한 시기 왕실의 일원이엇던 청주 한씨보다 더 컸는데, 특히 성종과 중종은 파평 윤씨 및 분파된 윤씨 집안에서 각각 2명의 왕비를 두었다. 다만 이는 상술했듯이 피를 부르는 권력 다툼을 보였으며, 결국에는 명종 후반 이후로는 그 세가 많이 꺾이게 되었다.
  • 윤효손 - 조선 조 명신으로 좌참찬을 지냈다. 보물 제584호로 지정된 신도비가 전라남도 구례군에 있다.
  • 윤집 - 삼학사 중 한 사람이자 척화론자. 병자호란 이후 청병에 의해 끌려갈 때에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여 죽고 난 후 청병이 오히려 감복하여 존경하였다고 한다. 특히 윤집의 가문은 3대가 충절을 지킨 가문으로 추앙받았다.[남원]
  • 윤휴 - 북벌론자. 당대 최고의 대학자. 청남의 영수.[남원]
  • 윤이도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관찰사, 좌승지,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조대수 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하였다. 이후 복직해 공조판서, 형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남원]
  • 윤증 - 윤선거의 아들이며 송시열의 제자였지만, 후에 송시열이 윤선거를 조롱한 문제로 반목한 회니시비노론소론이 갈라서면서 소론의 종장이 된다. 방계 후손[18]이 바로 윤석열 대통령.
  • 윤기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과거에 3번 장원하고 공조좌랑을 지냈으며, 다스리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직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당시 재상이 총애를 굳히려고 백관들에게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한다."고 위협하니 모두 따랐으나 공은 "어찌 신하된 자가 아첨하겠는가?"하면서 홀로 나가지 않았다.
  • 윤행임 - 양관대제학[19], 이조판서, 도승지. 당대 명필가였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고 정조가 뒷일을 부탁하였을 정도로 총애한 인물이며, 한 번 보면 무엇이든 외워버리는 조선의 천재였다고 한다.
  • 윤정현 -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청백리로 명성이 높아 고종이 직접 하사한 저택(지금의 명동성당 터)을 소유했었다.

근현대

5정치인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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