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괘릉은 원성왕릉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적 판단으로 소점한 최초의 왕릉이다.



(1)"貞元 戊寅年 (798, 원성왕 14년) 겨울에 이르러, 원성대왕께서 死後의 葬事에 대하여 遺敎하시면서 因山할 것을 명하였는데, 땅을 가리기가 몹시 어려워 이에 鵠寺를 지목하여 거기다가 유택을 모시려고 하였다.” 이때 의문을 제기하는 자가 있어(중략)...그러나 당국자가 말하기를 ‘(중략)능묘란 아래로는 지맥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을 헤아리며, 반드시 묘지에다가 四象을 포괄함으로써 천만대 후손에게 미칠 복을 보전하는 것이니 자연의 법칙이다. 불법에는 住相이 없고, 장례에는 성한 시기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단지 청오자와 같은 풍수가가 땅을 잘 보았으면 되었지 어찌 백마로 하여금 슬퍼하도록 할 것이랴"

숭복사지
참고로 곡사는 파진찬 벼슬의 김원양이 창건한 절이다. 이곳에 왕릉이 조성된 후 남동쪽으로 이전하고는 숭복사라 불렀다.
(2)"울창한 숲에 밝은 해가 드러나게 되면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한 지세의 위엄을 더해주었다. (중략) ... 수 놓은 듯한 봉우리는 사방 멀리에서 서로 조알하는 것 같고, 누인 명주같은 개펄은 한 가닥으로 눈앞에 바라보인다. 실로 喬山이 빼어남을 지니며 필백이 기이함을 표방하였다고 이를 것인 즉 金枝로 하여금 계림에서 더욱 무성하게 하고(생략)..."

괘릉 주위의 수로
왕릉 주변에 물이 보이는 것은 연못이어서 라기보다는 능선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샘으로 생각된다.
비문을 살펴보면 (1)의 글은 최치원(857-908?) 선생이 원성왕이 돌아가시기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798년에 원성왕릉 자리를 잡는데 풍수적 견해가 난무했음을 알 수 있다. 798년은 숭복사비명을 작성한 시기보다 100년이 앞서며 풍수비조인 도선국사(827-898)가 태어나기 30년 전의 일이다.
(2)의 글은 원문의 상황을 보건데 원성왕릉에 대한 최치원 선생의 풍수적 판단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원성왕릉이후의 신라왕릉은 풍수로 소점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풍수가 도선국사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 이미 신라에 만연했던 풍수를 집대성한 분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의상대사께서 600년대 후반에 저술한 풍수비결서 <산수비기>를 읽었다는 허균과 윤선도의 진술이 조선왕조실록에 적혀있는 것에 대한 믿음이 굳어진다
출처 : 서울동인풍수 김규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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