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한국의 역사 또는 한국사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동아시아의 한반도, 만주, 연해주 지역을 바탕으로 전개된 한국의 역사이다. 한국사의 시대 구분은 구석기시대에서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되는 선사시대와 고조선의 성립 이후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까지의 고대, 고려 시대인 중세, 조선 시대인 근세, 대한제국 수립 이후 오늘날까지의 근•현대 등으로 구분된다.
한국의 역사는 고찰하고자 하는 영역에 따라 한국의 경제사, 한국의 생활사 한국의 정치사와 같이 분야별 역사로 나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오늘은 대한제국 수립 이후 오늘날까지의 근•현대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본침략기

19세기에 들어 조선에는 같은 외세의 접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위기 속에 흥선대원군은 철저한 봉쇄 정책으로 일시적으로 접근을 막았으나, 이후 주위의 열강들과 무력 분쟁을 겪는 등 제국주의와 맞서게 되었다. 1870년대 초반에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압력을 행사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청나라와 충돌하였고,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조선과 요동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삼국간섭에 의해 잠시 물러섰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암살되었다. 1897년 10월 12일, 조선은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새롭게 정하였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부당한 요구와 간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한국의 곳곳에서는 의병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었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1910년에는 요적인 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조약 모두 강압에 의한 것이며 법적으로는 무효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제국의 점령에 저항하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에는 곳곳에서 비폭력적인 3.1 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이러한 독립운동을 총괄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에는 서로군정서와 같은 독립군이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쟁을 벌였고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부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는 시기까지를 군정기 또는 해방정국이라 한다. 해방정국에서 남과 북은 극심한 좌우 갈등을 겪었다. 북에서는 조만식과 같은 우익 인사에 대한 탄압이 있었고, 남에서는 여운형과 같은 중도 좌파 정치인이 암살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를 통해 소련과 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한국에서의 극심한 반대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폐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가 별도로 수립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는 기준이 되었다. 분단 이후 양측 간의 긴장이 이어졌고 수시로 국지적인 교전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침략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까지 존속한 제국이다.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추진 운동과 민권운동이 활발했으며,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인 광무개혁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구본신참' 성격의 점진적인 개혁으로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독립협회도 수구파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더욱 유입되었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1904년 2월 23일,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에게 '한반도 내에 영토, 시설등 군사적 이용을 협조할 것'을 강요하는 내용의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고문정치).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는데,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제국이 전략적인 승리를 얻게 되어 한반도에 영향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어서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일방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성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통감정치).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제국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으며, 다시 의병이 조직되어 무장 항전을 벌였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통감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한일 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차관정치), 이면 협약을 통해 군대를 강제로 해산(軍隊害刪)하였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과 가담하여 의병 운동의 양상은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60일간의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일제(日帝)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며 국권을 강탈당했다.(경술국치)
1910년대는 일제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억누르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한국인을 태형에 처하기도 했다.
토지조사사업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고, 회사령을 공포하여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극악한 환경과 저임금,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되었다. 또 산림령, 광업령, 어업령을 공포하여 민족자원약탈을 적극적으로 수탈하였다.
한편 한일병합으로 국내에서 민족 해방 운동이 어렵게 되자 민족 해방 운동가들은 국내에서는 비밀결사형태로 조직되었다. 근대 때부터 존재해 왔던 대표적 비밀결사 항일 운동 단체인 신민회는 안악 사건과 105인 사건을 계기로 해체되고 말았다.
해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미주 지역 등에서 민족 해방 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만주와 연해주 일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많이 이주하여, 간도 일대에 한인촌, 연해주 일대에 신한촌 등을 형성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제의 탄압에 핍박받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1919년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인 3•1 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발표는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켰고, 이는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파견하는 것과,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으로 이어진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만으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통치'를 시행했다.
이 문화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오히려 증강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 위한 '고등경찰제'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때 3.1 운동의 무자비한 진압을 보고 충격을 받은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는 무장 투쟁론과 외교 독립론 외에 실력 양성론이 나타난다.
윤치호, 안창호, 이광수, 신흥우, 김성수, 안재홍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교육과 문화 사업 등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한 뒤에 독립이 가능하다 판단하고, 학교 설립, 신앙 활동, 계몽 활동, 언론 활동, 문화 사업 등을 추진해 나간다.
그리고 일제는 무단통치시기에 금지되었던 언론`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이때에 탄생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후일 한국 사회의 주류 언론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20년대 초 신문에 대한 검열을 통해 삭제, 정간, 폐간을 자행하였다. 또한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단체의 설립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또 조선인의 교육의 기회를 늘리겠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노동력 양성을 위한 산학과 같은 초급 학문이나 기술 교육만을 허용하였고,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한 운동도 탄압하였다.
민립대일제는 조선인을 기만하고 식민통치를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의 분열과 이간을 조장하였다.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던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자치론자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을 상대로 조선인의 자치권을 청원하는 운동을 계속하였다.
한편 해외에서는 3•1 운동에서 드러난 조선 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내부의 독립운동 방법론 차이에 따른 분열과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임시정부 주도의 독립운동은 한동안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들은 3•1 운동을 계기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국내에는 천마산대, 구월산대 등의 유격활동을 하는 게릴라부대 등이 존재하였다. 특히 천마산대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역할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계열과 사회주의자의 연대가 계기가 된 6•10 만세 사건(1926년)과, 해외에서의 불어온 좌우합작의 분위기로 인해 국내에서도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에 만들어진 것이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민족단체였던 신간회이다. 신간회는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세력과 결별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자 계열이 모여 만든 좌우합작단체인데, 국내의 많은 대중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3•1 운동 이후 가장 큰 항일 운동이었던 광주학생운동(1929년)에도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노동운동이 항일운동으로 변화되는 성격을 지닌 원산 총파업도 지원하였다.
특히 신간회는 많은 사회 대중운동을 주도해 나갔는데, 대표적인 여성 단체였던 근우회를 자매단체로 두기도 하였고, 형평 운동이나 청년 운동 등 많은 대중 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국내외에서 일본요인의 암살, 파괴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가는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 투쟁도 활발하였다.
무장투쟁 외에도 자체적인 실력 양성론이 전개되어 김성수 계열과 조만식 계열을 중심으로 일본과 외국계 자본에 대항하는 국내 자본 양성 노력이 시도되었다. 안재홍과 정인보 등은 유적지 발굴과 역사 연구를 진행해 나갔고, 장택상 등은 해외로 반출되는 고미술품을 매입하여 유물의 반출을 차단하였다.
1920년대 대공황에 시달리던 일제는 그 타개책으로 식민지 확보를 통한 블록경제를 선택하였다. 그에 따라 1930년대 일제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또한, 1941년 일제가 미국의 진주만을 선전 포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이른바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되었고, 학도 지원병, 징병제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의 명목아래 성노예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침체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활동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 애국단의 활약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애국단의 일원이었던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도 끌어내 후에 중일전쟁 이후에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발판이 될 수 있었다.
1930년대의 독립운동의 중심점은 김원봉과 김규식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이후 김원봉과 김규식, 그리고 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만주지역에 자유시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사실상 중단된 무장 독립 투쟁 노선도 1930년대 초반부터 한중연합작전을 전개해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만주침략이 본격화된, 만주국 수립 이후에는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이 힘들어지자, 지청천과 같은 혁신의회 계열의 한국독립군 인사들은 임정의 요청을 받고 중국 관내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여건 속에서도 만주에서는 한중연합작전을 넘어선 한중연합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 중국 관내에서는 많은 항일 무장 부대가 편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원봉과 김규식, 지청천, 조소앙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와,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김두봉 등이 주도한 조선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 인사들이 충칭의 임시정부로 합류하자, 당 산하의 조선의용대의 다수의 세력은 화북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였다. 그 후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독립동맹의 산하 군조직으로 편성되었다.
1910년 이후로 침체되었던 외교독립론은 1933년 이승만이 제네바 회의에 참석한 것을 이후로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외교 활동은 1930년까지도 미미하다가 1932년의 윤봉길, 이봉창의거를 계기로 활기를 띠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 독립의 승인을 요청했고, 1941년의 태평양 전쟁 이후 그의 노력이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한국광복군을 연합군과 연합작전을 시행하였다. 미얀마와 인도 일대에서는 영국군의 지원요청으로 주로 심리전 역할을 담당하였고, 미국의 OSS 전략사무국과 함께 정진 군을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나, 도중에 일본이 항복하여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종료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으나, 곧이어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해 주둔함으로써 군정이 시작되었고, 이 기간에 좌우익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결국 1948년에 38선 이남에서 총선거가 실시된 후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면서 남북이 분단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는 한국 전쟁을 거쳐 한반도 이남의 대한민국과 한반도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확실히 나뉘게 되었다.
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와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의 영향으로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한반도 내에는 건국준비위원회등이 치안과 행정권을 담당하여 혼란한 해방정국 상황을 일시적으로 수습하였으나, 9월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정책과 포고령으로 불인정되었고, 곧이어 한반도에는 군정기를 맞게 된다. 군정기 기간 동안 좌∙우익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좌우합작운동 등이 추진되었으나 구심점을 잃게 되었다. 트루먼 독트린이 계기가 되어 냉전이 시작되고, 계속되는 좌, 우익 세력의 대립으로 인해 남북 각각 단독정부 수립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각자 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된다는 여론이 우세하게 작용했다.
특히, 1950년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하였고,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기반시설은 대부분 초토화되어 남북한 사이 간의 상호 불신이 더욱 깊어 갔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참상과 깊은 후유증속에, 1950년대에는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으며 삼백산업의 발달로 전쟁의 참혹한 폐허의 상처를 딛고 경제를 복구해 나아갔다. 이후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여 자유당의 영구집권 음모로 발생한 3•15 부정 선거의 후유증으로 부정선거 개표와 재선거를 촉구하는 시위가 4•19 혁명으로 번지면서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허정의 과도내각을 거쳐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정권교제인 제2공화국은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구파, 신파 간 갈등으로 1년 만에 5•16 군사 정변으로 몰락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정부주도의 경제발전 계획 이래 경공업 및 경제개발계획 등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룩하며,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에 육성에 크게 기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수준을 추월하는 등 크게 발전해 나아갔고, 1980년대에는 '3저 호황'으로 경제안정기를 맞아 첨단산업이 발달하였다. 1997년 11월에 IMF로 경제위기난을 겪기도 하였지만, 2001년 8월 IMF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광복 직후에 대한민국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다.
또한, 4∙19 혁명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제5공화국까지 이어지던 1987년에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주의 정부가 새로 출범함으로써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었으며,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져 가고 있다.
광복 이후에는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넓어지면서, 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가치관의 혼란과 전통문화의 위축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는 점이 있다. 오늘날 민주화와 더불어 문화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반도체 등 몇몇 과학 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대한민국은 20세기말 찾아온 IMF 경제위기로 인해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었으나, 미국의 원조지원과 그 국민의 뛰어난 단합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빠른 경제회복을 맞았다. 대한민국은 천연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나, 높은 교육열과 학생들의 뛰어난 학습력 및 공부에 대한 의지로 인적 가치에 의지하고 있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가진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배출된 수많은 인재가 대한민국 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 역량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바이다. 또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국민들은 단합의 기회를 갖고, 그 이후 시민의식 수준이 더 높아지게 되었다.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의 저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편, 대한민국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단연 교육의 힘만이 아니다. 현대 대한민국은 문화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다.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은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그 종류도 세분화되었다. 또한, 학습적인 교육에만 국한된 교육이 아닌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융합형 인재는 물론이고 음악, 미술, 체육 등에 능통한 예술 인재 또한 배출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 인재들은 대한민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육이 다른 분야에 영향을 미친 예이다. 대한민국의 노래들은 K-Pop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아이돌 및 가수들은 해외로 나가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세계인들은 K-Pop에 열광하며 엄청난 규모의 해외 팬까지 생겼다.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계 각지로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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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원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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